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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한민국 해군의 시작, 백두산함을 기억하다 (3)

<3> "해군 창군의 주역 5인방" 손원일은 상해에 있는 동안 동화양행 상해 지점장 자리를 방패 삼아, 비밀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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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한민국 해군의 시작, 백두산함을 기억하다 (3)

<3> "해군 창군의 주역 5인방"

손원일은 상해에 있는 동안 동화양행 상해 지점장 자리를 방패 삼아, 비밀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마련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봉천(奉天)으로 출장 갔다가 그곳에서 일본 왕 미치노미야(어감이 참 묘하다)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방송을 듣고서, 동이 난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다가, 다음날 웃돈을 듬뿍 얹어주고 구한 표로 경성으로 향한다.

1945년 8월 17일, 경성에 도착한 손원일은 가족과 재회의 기쁨을 나눈 다음 날 오후, 윤치창을 찾아가 해군 창군 의지를 피력한다. 윤치창은 미군이 허락할 리가 없다며, 우리나라가 주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할 것이라고 한다.

그 까닭은,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려고, 미군 수송기를 빌려 타고 경성 비행장(現 여의도 공원 자리)에 도착한 광복군 국내정진대(國內挺進隊)를 중국으로 쫓아내는 일본군의 짓거리를 미군이 보고도 모른척하기 때문이다.

손원일은 분개한 마음을 드러내며 "매형! 사장(査丈)어른의 한(恨)은 어떡하고요?"라면서 강하게 뜻을 굽히지 않는다. 기실…. 운요호 사건 이듬해인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에 조선과 일본 사이 강제로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즉 강화도 조약 이후, 고종은 수군 재건과 군함의 필요성을 느껴 군함(양무호)을 마련했으나, 일본의 무역회사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에게 사기당한 쓸모없는 군함(상선에 고물 포만 장착한)이었다.

게다가 배를 운용할 수군조차 없어 인천항에 방치했다. 이에 군부대신 윤웅렬(尹雄烈 ‧ 윤치창의 父)은 수군을 재건하여 양무호를 사용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적 파탄과 의정부와 조정의 반대 그리고 고종과 원수부(元帥府)의 무능까지 겹쳐 무산되면서, 윤웅렬이 군권에서 밀려난 일이 있었다. 손원일의 말에 아버지를 의식한 윤치창은, 마음을 돌려 손원일을 연희전문학교 교장 유억겸과 만나도록 주선한다.

유억겸은 손원일의 포부를 듣고 "그렇게 중대하고 무거운 일을 미군정 도움 없이 어찌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 이에 윤치창이 나서서 손원일은 동화양행 상해 지점장 시절 돈벌이가 좋아서 독립자금을 댈 수 있었고, 얼마 전까지 독립자금으로 큰돈을 마련했는데, 때마침 나라가 독립되니, 그 돈에다 사재까지 털어 초기 자금을 마련했고, 자신도 부친을 생각해서 가만있을 수 없어 사재를 보태 도울 것이라고 한다.

유억겸은 "그만한 돈으로는 어림없지…."라고 하면서도, 박규수(朴珪壽)의 같은 문하생이었던 윤치창의 아버지(윤웅렬)와 자신의 아버지(유길준) 간의 교분을 생각해서라도 돕겠다면서, 때가 되면 미군정청 관계자와 다리를 놓겠다고 한다.

사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유억겸은 미군정 학무국장(문교부장)이며,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과 군정장관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과도 수시로 독대하는 사이로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유억겸은 우선 해양·수산 분야의 전문 인재인 김영철(金英哲)과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행정에 밝은 민병증(閔丙曾)을 소개해 주는 한편, 자신이 집사(執事) 직분으로 있는 안동교회 김강원(金剛原) 목사에게 교회 건물 중 사무실로 사용할 공간을 빌려보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안동교회는 대한민국 해군 "창군의 요람"이 된다.

마침내 손원일은 김영철, 민병증과 무작정 풀 통을 들고 종로 거리로 나서서 뜻있는 동지들을 구한다는 내용을 적은 벽보를 붙이고 다니기 시작하는데…, 며칠 뒤, 거리 다른 쪽에서 같은 내용의 벽보를 붙이던 정긍모(鄭兢謨)와 한갑수(韓甲洙)를 만난다.

그들은 마치 지구간(知舊間)이라도 되다는 듯이 만나자마자 "우리의 바다는 우리 손으로 지키자"라면서 종로 골목길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나누며 도원결의를 한다. 손원일, 김영철, 민병증, 정긍모, 한갑수…. 해군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해군 창군의 주역 5인방이라고 부른다.

이튿날인 1985년 8월 21일. 이들 5인방이 안동교회(安洞敎會 ‧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했으니…. 해군에서는 이날을 이순신 장군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 이 땅에 다시 움튼 날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역사에서 멸사봉공의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상징적인 위인은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손정도 목사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일제(日帝)의 고문으로 몸이 망가지면서도, 평생을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더러운 곳을 닦아내는 정신, 이른바 걸레 정신으로 민족의 독립과 공익을 위해 살았다.

게다가 그의 아들 손원일은 아버지처럼 사재를 몽땅 털어, 조선 후기 권력자들의 파벌 권력 다툼으로 해체되고만 조선 수군의 명맥을 잇는 전통적 정통성(Traditional Legitimacy)을 내림 받을 해사대(海事隊 ‧ 대한민국 해군 모태)를 결성했다.

앞으로 연재할 대한민국 해군창설과 백두산함 구매에 얽힌 아름답고 눈물겨운 자취가 혼합된 서사(敍事)를 독자들이 알아 가면,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이순신 장군의 멸사봉공 정신이, 다시 이 땅에 싹튼 날이라는 해군의 견해와 같이하는 필자의 사설(社說)에 하는 이가 많으리라 여긴다.

안동교회에 해사대 사무실을 차려 놓은 지 불과 며칠 사이, 벽보를 보고 온 청년들이 200명을 훌쩍 넘기자 보다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이때 정긍모가 나서서 일제가 남기고 떠난 청량리의 조선총독부 전매국(朝鮮總督府 專賣局)이 비어 있다며 그곳으로 옮기자고 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대한민국 해군 최초 선발 시험과 교육 그리고 훈련이 시작된다.

최종 선발자 80명은 정신 교육, 기초 체력 훈련, 제식 훈련, 선박 운항법, 천문항해학, 독해도(讀海圖), 선박 엔진 구조와 운용법 정비, 영어, 군사 통신 등을 교육받는다. 하지만 손원일은 무턱대고 전매국을 사용하는 게 께름칙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생각 끝에 9월 1일, 건준(建準 ‧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으로 찾아간다.

여운형과 절충하여 건준 산하에 해사과(海事課)를 설치하는 대신 전매국을 훈련, 교육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미군정청의 허락을 받아달라고 요청한다.

이 무렵, 미군정청은 군정청 요소요소에서 일할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 여럿 필요했다. 때마침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한 윤치창도 발탁되어, 미군정청 재무부 산하 전단국(專亶局)장과 전매국(專賣局)장을 겸임하게 된다.

얼마 후, 손원일은 윤치창으로부터 해사대가 전매국을 무단으로 계속 사용하면 강제로 쫓겨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더욱이 미군정청의 허락을 받아주겠다던 여운형마저 감감무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골칫거리는 건준에 들어가서 알게 된 복잡한 내부 사정이었다.

민족주의 계열(우익) 인사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좌익)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체제 개편과 함께 극좌 성향으로 기우는 이런 혼란 속에서, 온전한 해군을 창설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불과 한 달 만인 9월 30일 건준에서 탈퇴한다.

그 후 손원일은 한때 일제 교통국 해사과의 외곽단체였던 "조선해사보국단(朝鮮海事報國團)"을, 해방되자마자 접수하여 이끌어가고 있는 석은태(石銀泰)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묵묵히 듣고 난 석은태는 손원일에게 깊이 감동한 나머지, 대승적 견지에서 조선해사보국단의 모든 조직·인력·건물 자산을 조건 없이 내놓는다. 그리하여 해사대는 청량리 전매국을 떠나 회현동의 조선해사보국단으로 옮겨, 그곳에서 "해사대"와 "조선해사보국단" 두 단체가 통합한 조선해사협회(朝鮮海事協會) 출범식을 가진다.

<계속>

최순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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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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