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통번역 시대 중국서 번지는 '영어 무용론'…새 영어 교과서엔 단오절·해외 원조
AI 통번역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중국에서는 영어를 지금처럼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배워야 하느냐는 논쟁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새 영어 교과서는 서구 문화 대신 중국의 역사·문화·해외 원조를 영어로 설명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AI 통번역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중국에서는 앞으로도 영어를 지금처럼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배워야 하느냐는 논쟁이 커지고 있다. 해담경제연구소 어예진 소장이 출연한 '언더스탠딩 : 세상의 모든 지식' 영상은 이 논쟁이 단순히 'AI가 있으니 영어가 필요 없다'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미국과의 기술 경쟁과 정보 통제, 문화적 분리까지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영어 잘하는 능력, 더는 희소하지 않다
실시간 번역은 물론 이메일 작성이나 해외 문서·뉴스 해석까지 AI가 대신하면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만큼 희소한 능력이 아니게 됐다는 것이 논쟁의 출발점이다. 영상에 따르면 중국의 한 인플루언서이자 수학 교사가 소셜 미디어에 학교의 필수 과목인 영어를 선택 과목으로 바꾸자는 글을 올려 큰 논쟁이 일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돈을 많이 쓰고 어려운 대학 시험을 치러도 졸업하면 영어를 쓰지 않고, 배워도 정작 영어 한 마디를 못 한다는 것이다. 그는 AI가 통번역을 다 해주는 시대에 중국어나 수학과 같은 기준과 무게로 영어를 평가하는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비슷한 움직임은 교육 현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영상에 따르면 상하이에서는 영어 기말시험을 폐지했고, 대학 입시인 가오카오에서도 영어 점수 비중을 중국어·수학과 같이 두지 말고 줄이자는 의견이 나온다. 선전의 한 연구 대학에서는 AI가 다 번역해 주니 영어 과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앞서 2021년쯤에는 사교육비와 학교 밖 숙제 부담을 줄이겠다며 사교육을 억제하는 정책이 시행돼 영어 사교육 시장이 한때 흔들리기도 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AI는 영어 교육 서비스의 생산 비용을 낮췄다. 과거 영어를 배우는 데 돈이 많이 들었던 이유는 회화 상대나 가르쳐주고 교정해주는 사람의 값이었는데, 이제는 새벽 두 시에도 AI에게 영어 상대를 부탁할 수 있다. 영상은 중국 매체가 교육 수준이 높은 지역의 중국인들을 세대별로 인터뷰한 영상도 소개했다. 응답자들은 자신의 영어 회화 수준이 10점 만점에 5점을 넘지 않는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 너무 시험 위주로 배웠고 일할 때도 영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반론도 있다. 영어는 의사소통 수단일 뿐 아니라 정보나 다른 세계에 접근하는 통로이며, 한 끗 차이의 능력이 계층 간 격차를 더 벌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더 수준 있는 영어를 배우기 위한 비용이 더 커지고 웬만한 수준으로는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며, 언어 능력에 따라 AI를 쓰는 방식과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 영어 교육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세계로 나아가는 창구'에서 '중국을 설명하는 영어'로
영상은 중국이 영어를 받아들이는 시각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을 더 중요한 변화로 꼽았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영어는 세계로 나아가는 창구로 여겨졌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고 해외 기업을 인수하며 글로벌 공급망과 무역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영어는 서구 기술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연결망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 시대에는 경제 성장보다 체제의 안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영어가 서구의 가치관이나 개인주의, 권력에 대한 의문을 불러오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위협으로 여겨 왔다는 설명이다.
교과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영상에 따르면 최근 중국 초등학교와 중학교 영어 교과서가 크게 바뀌었다. 예전에는 할로윈 문화나 미국 문학, 미국 생활 같은 내용이 실렸지만, 새 교과서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과 단오절, 중국의 해외 원조 같은 내용을 영어로 담았다. 개편은 2024년부터 단계적으로 이뤄져 올해 가을부터 전면 적용됐다. 과거 영어가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창구였다면, 이제는 중국의 관점과 문화를 외부에 전달하는 수단으로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에이전트'·'토큰'까지 중국어로…'담론의 힘' 확보
세 번째 변화는 기술 용어다. 영상에 따르면 중국 관영매체 인민일보는 지난 8월 대중에게 AI와 관련된 영어 표현을 줄이고 중국어 표현을 쓰자는 논평을 냈다. AI에서 흔히 쓰는 '에이전트', 'LLM' 같은 표현을 중국어 표현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외국의 기술 용어를 지나치게 쓰다 보면 인지적인 의존이 생긴다는 여론이 형성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난 3월에는 '토큰'이라는 표현을 중국이 공식적으로 '치위안'이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영상은 이를 기술 패권 경쟁에서 기술을 지칭하는 언어와 공급 구조를 아우르는 독자적인 '담론의 힘'을 확보하려는 흐름으로 설명했다. 결국 중국의 영어 논쟁은 교육 효율성의 문제를 넘어 미국과의 기술 경쟁, 정보 통제, 문화적 분리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어설픈 영어의 경제적 가치가 낮아질 수 있지만, 원문을 직접 이해하고 맥락과 뉘앙스를 파악할 수 있는 고급 영어 능력은 오히려 차별화된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함께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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