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하이픈 헌혈 캠페인 177개국…‘약속’ 다음은 재헌혈
세계보건기구(WHO)가 23일 서울에서 엔하이픈과 진행한 글로벌 헌혈 캠페인의 177개국 9000건 넘는 서약 성과를 공개했다. 다만 서약은 실제 헌혈이 아니며, 첫 참여를 반복 헌혈로 전환하고 국가별 혈액 공급 격차를 줄이는 후속 설계가 과제로 남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3일 서울에서 그룹 엔하이픈과 함께 진행한 글로벌 헌혈 캠페인의 성과를 공개했다. 177개국에서 9000건이 넘는 헌혈 서약을 모았고, 이 가운데 3250명 이상이 팬덤 ‘엔진(ENGENE)’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숫자는 실제 채혈 건수가 아니라 앞으로 헌혈하겠다는 약속이다. 캠페인의 다음 성적표는 처음 팔을 걷은 사람이 두 번째 헌혈까지 이어지는지에 달렸다.

9000건은 ‘헌혈량’ 아닌 참여 의향
WHO와 엔하이픈의 협업은 세계 헌혈자의 날인 6월 14일 시작됐다. 음악과 소셜미디어, 글로벌 팬 커뮤니티를 활용해 무상 자발 헌혈의 필요성을 알리는 방식이다. WHO는 관련 콘텐츠가 수백만 명에게 도달했다고 설명했지만 조회 수나 서약 수를 혈액 확보량으로 환산하지는 않았다.
실제 행동도 일부 확인됐다. 멤버 전원은 서울의 대한적십자사 헌혈의집에서 헌혈 가능 여부를 검사받았고, 제이와 정원은 혈장 헌혈을 했다. 인도네시아·필리핀·독일·미국의 팬들도 헌혈 사진과 경험을 공유했다. 그러나 WHO 발표에는 이 캠페인으로 이뤄진 실제 헌혈 건수, 부적격 판정 수, 재헌혈률이 제시되지 않았다. 9000건을 ‘9000회의 헌혈’로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 구분은 단순한 통계 예절이 아니다. 혈액과 혈액 성분은 보관 기한이 있어 한 차례의 대규모 참여보다 일정한 간격의 반복 헌혈이 공급 안정에 더 중요하다. WHO도 젊은 세대가 정기 헌혈자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팬덤 캠페인은 사람을 첫 화면까지 데려오는 강력한 입구가 될 수 있지만, 예약·문진·검사·채혈·다음 방문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별도의 운영 역량을 요구한다.
팬덤의 확산력, 혈액 공급 격차를 만나다
이 캠페인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세계 혈액 공급의 구조적 불균형이 있다. WHO가 2026년 6월 공개한 2023년 기준 자료를 보면 전 세계 헌혈은 약 1억2040만 건이다. 세계 인구의 15%가 사는 고소득국이 전체 헌혈의 36%를 확보한다. 인구 1000명당 헌혈률 중앙값은 고소득국 28.9건, 저소득국 4.5건으로 6배 이상 차이가 난다.
| 지표 | 고소득국 | 저소득국 |
|---|---|---|
| 세계 인구 비중 | 15% | - |
| 세계 헌혈 비중 | 36% | - |
| 인구 1000명당 헌혈률 중앙값 | 28.9건 | 4.5건 |
| 혈액 성분 분리 비율 | 98% | 52% |
혈액을 적혈구·혈소판·혈장 등으로 나눠 여러 환자에게 맞게 쓰는 역량에서도 차이가 난다. 저소득국에서는 수집 혈액의 52%만 성분으로 분리되는 반면 고소득국은 98%다. 팬 한 명의 헌혈은 분명 생명을 돕지만, 국가별 검사 장비·냉장 운송·성분 분리·재고 배분 체계가 뒷받침돼야 그 선의가 환자에게 제때 도달한다.
따라서 177개국이라는 넓이는 캠페인의 장점이면서 평가의 출발점이다. 참여국 수가 많다는 사실만으로 접근성 격차가 줄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약자가 실제로 어느 국가에서 헌혈했는지, 현지 혈액원이 신규 수요를 받을 여력이 있었는지, 젊은 첫 헌혈자가 다시 방문했는지를 지역별로 공개해야 캠페인의 보건 효과를 판단할 수 있다.
‘한 번의 선행’을 습관으로 바꾸려면
첫 헌혈자를 붙잡는 데는 캠페인 이후의 연락 방식이 영향을 준다는 연구가 있다. 국제학술지 ‘Transfusion’에 실린 2019년 현장시험은 이란의 첫 헌혈자 1356명을 여섯 집단으로 무작위 배정해 6개월 안에 두 번째 헌혈을 시도하는 비율을 비교했다. 감성적 편지를 받은 집단은 36%, 교육용 편지는 33.2%, 전화 알림은 31.5%가 돌아왔다. 별도 개입이 없던 대조군은 22.1%였다.
이 결과를 한국이나 모든 팬덤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연구 장소가 한 국가의 네 곳 혈액센터였고, ‘재방문’은 두 번째 헌혈을 완료한 경우가 아니라 시도한 경우로 정의됐다. 그럼에도 첫 참여 직후에 교육 정보와 알림을 제공하면 단발성 관심을 반복 행동으로 옮길 여지가 있다는 점은 보여준다.
엔하이픈 캠페인의 후속 설계도 같은 지점을 겨냥할 수 있다. 서약 페이지가 국가별 공식 혈액원 예약 창구로 연결되는지, 실제 헌혈을 마친 참가자에게 다음 가능 시점과 준비 사항을 안내하는지, 일시적으로 헌혈하지 못한 사람에게 재도전 경로를 제시하는지가 중요하다. 팬 인증이나 기념품처럼 보이는 장치보다 정확한 자격 정보와 가까운 헌혈처, 안전한 사후 관리가 먼저여야 한다.
성과 공개 방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도달 인원, 서약, 예약, 문진 통과, 헌혈 완료, 6개월 안 재방문을 하나의 전환 경로로 분리해 집계하면 캠페인의 실제 병목을 찾을 수 있다. 개인 건강정보는 보호하되 국가·연령대별 집계와 중도 이탈 사유를 익명 통계로 내놓는 방식이 가능하다. WHO 발표처럼 서약과 실제 행동을 구분하는 것은 좋은 출발이지만, 이후 전환율까지 보여줘야 재현 가능한 공중보건 모델이 된다.
스타의 메시지보다 오래 가야 할 것
WHO 자료에 따르면 자발적 무상 헌혈은 2023년 세계 헌혈의 85% 이상을 차지했다.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32개국에서 수집량은 약 19% 늘었다. 동시에 55개국은 인구 1000명당 헌혈이 10건에도 못 미쳤고, 59개국은 혈액 공급의 절반 이상을 가족 대체 헌혈이나 유상 헌혈에 의존했다. 유명인의 호소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관심 부족만이 아니라 공급망과 제도의 격차다.
이번 협업의 가치는 헌혈을 낯선 의료행위가 아니라 또래가 함께하는 일상적 참여로 번역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캠페인이 성공했다고 말할 기준은 팬덤의 크기가 아니다. 처음 헌혈한 사람이 안전한 경험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지, 그리고 헌혈이 부족한 지역의 환자가 필요한 혈액을 제때 받는지다. 서약 9000건은 결승선이 아니라 이제 측정해야 할 출발선이다.
참고자료
- WHO, “WHO and ENHYPEN join efforts to inspire young blood donors globally” (2026-10-23): https://www.who.int/naoero/news/detail-global/23-10-2026-who-and-enhypen-join-efforts-to-inspire-young-blood-donors-globally
- WHO, “Blood safety and availability” (2026-06-12): https://www.who.int/news-room/fact-sheets/detail/blood-safety-and-availability
- WHO, “Safe blood supply improves as voluntary donations exceed 85%, but many people still lack access” (2026-06-12): https://www.who.int/news/item/12-06-2026-safe-blood-supply-improves-as-voluntary-donations-exceed-85---but-many-people-still-lack-access
- Hashemi et al., “Effective ways to retain first-time blood donors: a field-trial study” (2019):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10.1111/trf.1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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